하루를 미뤘습니다
지훈 씨(가명)는 첫 전세 계약이었습니다. 보증금 2억 4천만원, 서울 외곽의 빌라. 부모님께 빌린 돈과 전세대출을 합쳐 만든 돈이었고, 그에게는 전 재산이었습니다.
잔금을 치른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짐을 옮기고, 청소를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다섯 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주민센터는 여섯 시에 닫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 "월요일에 해도 되지 뭐. 어차피 이사는 다 했잖아."
지훈 씨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았습니다. 사흘 차이였습니다.
그 사흘 사이에 집주인은 그 빌라를 담보로 1억 8천만원을 대출받았습니다. 근저당권 설정등기가 토요일 자로 접수되어 있었습니다.
1년 반 뒤 그 빌라는 경매에 넘어갔고, 낙찰가는 2억 1천만원이었습니다. 근저당권자인 은행이 먼저 1억 8천을 가져갔습니다. 지훈 씨에게 배당된 금액은 3천만원 남짓이었습니다.
대항력은 이사한 날이 아니라 "전입신고를 마친 다음 날 0시"부터 생깁니다. 그리고 등기는 접수된 순서대로 순위가 정해집니다. 지훈 씨가 잃은 2억은, 서류 한 장을 사흘 미룬 대가였습니다.이 글은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 한 장을 어떻게 읽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계약서는 집을 빌리는 서류가 아니라, 보증금을 돌려받을 근거를 만드는 서류입니다.
왜 하필 '표준'계약서인가
시중에는 문구점에서 파는 계약서, 부동산에서 쓰는 자체 양식, 인터넷에서 받은 파일이 섞여 돌아다닙니다. 어느 것으로 써도 계약은 성립합니다. 그런데도 법무부 표준계약서를 권하는 이유는, 이 양식이 분쟁이 났을 때 문제가 되는 지점들을 미리 칸으로 만들어 둔 서식이기 때문입니다.
법무부가 국토교통부·서울시와 함께 만들었고, 근거는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0조입니다. 현재 판본은 2023년 10월 6일 개정본입니다.
일반 계약서에는 없고 표준계약서에만 있는 칸을 꼽으면 이렇습니다.
- 미납 국세·지방세 확인란 — 집주인의 체납 세금은 경매에서 내 보증금보다 먼저 배당됩니다
- 선순위 확정일자 현황 확인란 — 나보다 먼저 들어온 임차인의 보증금이 얼마인지
- 관리비 세부 항목 — 월 10만원 이상이면 8개 항목으로 쪼개서 적게 되어 있습니다
- 입주 전 수리 조항 — 무엇을, 언제까지, 안 고쳐주면 어떻게 할지
- 저당권 설정 금지 특약 — 지훈 씨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 이미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 칸들은 장식이 아닙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1면: 계약서를 쓰기 전에 채워야 할 칸들
소재지와 '용도'
소재지는 등기사항전부증명서·건축물대장과 글자 하나까지 같아야 합니다. 특히 다가구주택은 등기부에 호수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실제 사용 호수를 계약서와 전입신고서에 동일하게 적어야 나중에 대항력이 인정됩니다.
건물의 구조·용도 칸은 그냥 넘기기 쉬운데, 여기가 함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건축물대장상 용도가 '근린생활시설'인 이른바 근생빌라는 법적으로 주택이 아닙니다. 전입신고에 제약이 생기고,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이 거절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시정명령·이행강제금 대상 건물에 살게 됩니다. 계약 전 정부24에서 건축물대장을 떼어 '용도'를 확인하세요. 1분이면 됩니다.
계약의 종류 — 갱신요구권을 썼는지가 갈리는 칸
신규 계약 / 합의에 의한 재계약 / 계약갱신요구권 행사에 의한 갱신계약 중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칸이 중요한 이유는, 계약갱신요구권은 임대차 기간 중 딱 한 번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대인과 좋게 합의해서 재계약한 것은 갱신요구권을 쓴 것이 아니므로, 나중에 한 번 더 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갱신요구권을 행사한 갱신이면 그 카드는 소진됩니다.
말로만 "재계약합시다" 하고 넘어가면 2년 뒤 서로 다르게 기억합니다. 표시해 두세요.
미납 국세·지방세, 선순위 확정일자 현황
전세사기 사건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두 항목입니다.
집주인이 세금을 체납하고 있으면, 그 세금은 경매 배당에서 내 보증금보다 먼저 가져갑니다. 앞선 임차인이 있으면 그 사람의 보증금이 먼저 나갑니다. 둘 다 등기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등기부만 보고 "근저당 없네, 깨끗하다" 하고 계약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확인 방법:
| 확인할 것 | 어디서 | 필요한 것 |
|---|---|---|
| 미납 국세 | 관할 세무서 (홈택스 아님) | 임대인 동의서 또는 계약서 |
| 미납 지방세 | 주민센터·시군구청 | 임대인 동의서 또는 계약서 |
| 선순위 확정일자 현황 | 주민센터·등기소 | 임대인 동의 또는 계약서 |
2023년 4월부터는 계약을 체결한 임차인이라면 임대인 동의 없이도 임대차 시작일까지 미납국세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계약 전이라면 임대인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건 꼭 기억하세요. 임대인이 이 열람을 꺼린다면, 그 자체가 신호입니다. 떳떳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2면: 돈과 기간, 그리고 수리
보증금·차임·관리비
관리비 칸은 2023년 개정에서 크게 손본 부분입니다. 정액 관리비가 월 10만원 이상이면 일반관리비·전기료·수도료·가스사용료·난방비·인터넷사용료·TV사용료·기타관리비 여덟 항목으로 나눠 적어야 합니다. 정액이 아니면 산정방식(세대별 사용량 비례, 세대수 비례 등)을 적습니다.
"관리비 별도"라고만 적힌 계약서가 입주 후 분쟁의 단골입니다. 원룸·오피스텔에서 월세를 낮게 부르고 관리비를 부풀리는 방식이 문제가 되면서 생긴 조항입니다.
입금계좌는 반드시 임대인 본인 명의인지 확인하세요. 배우자·자녀 계좌로 보내라는 요구는 거절하는 게 맞습니다.
임대차기간 — 2년은 임차인의 권리
인도일(보통 잔금일)과 종료일을 적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최소 2년이 보장되며, 1년으로 계약해도 임차인은 2년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임차인이 1년만 살고 싶다면 1년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비대칭이 임차인 보호 장치입니다.
입주 전 수리 — 말로 한 약속은 증거가 없습니다
"보일러는 들어오기 전에 고쳐 드릴게요."
계약 자리에서 가장 흔하게 오가는 말이고, 가장 자주 지켜지지 않는 말입니다. 표준계약서 제3조는 이걸 세 칸으로 만들어 뒀습니다.
- 수리 필요 시설 — 무엇을 (안방 창호 결로, 거실 보일러 온수 불량)
- 수리 완료 시기 — 언제까지 (보통 잔금지급 기일)
- 미수리 시 처리 — 안 고쳐주면 어떻게 (수리비를 보증금 또는 차임에서 공제)
세 번째 칸이 핵심입니다. 이게 없으면 안 고쳐줬을 때 할 수 있는 게 사정하는 것뿐입니다. 계약 전 집을 볼 때 하자를 사진으로 남겨두고, 이 칸에 옮겨 적으세요.
특약사항: 이미 인쇄되어 있는 문장을 지키는 것
표준계약서 특약사항란에는 여섯 개의 문장이 미리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중 첫 두 개가 지훈 씨의 사고를 막는 조항입니다.
> 주택을 인도받은 임차인은 ____년 __월 __일까지 주민등록(전입신고)과 주택임대차계약서상 확정일자를 받기로 하고, 임대인은 위 약정일자의 다음날까지 임차주택에 저당권 등 담보권을 설정할 수 없다.
> 임대인이 위 특약에 위반하여 임차주택에 저당권 등 담보권을 설정한 경우에는 임차인은 임대차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할 수 있다. 이 경우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위 특약 위반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대항력이 전입신고 다음 날 0시에 생긴다는 시차 때문에 만들어진 조항입니다. 잔금 치른 당일에 임대인이 대출을 실행하면 임차인이 후순위로 밀리는데, 이 특약이 있으면 계약 해지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빼자고 하는 임대인이나 중개사가 있다면, 그 계약은 다시 생각하세요.세 번째 문장은 2023년에 추가된 것으로, 임대인이 고지하지 않은 선순위 임대차 정보나 미납 세금이 확인되면 임차인이 계약금을 포기하지 않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게 한 조항입니다. 예전에는 뒤늦게 체납 사실을 알아도 계약금을 날리고 나와야 했습니다.
추가로 넣을 만한 특약을 몇 개 적어 둡니다.
- 임대인은 잔금일 다음 날까지 근저당권 등 담보권을 설정하지 않으며, 위반 시 계약은 해제되고 보증금 전액을 즉시 반환한다
- 임대인은 계약 기간 중 소유권을 이전하는 경우 임차인에게 사전에 통지한다
- 입주 전 도배·장판은 임대인 부담으로 시공한다
- 반려동물(○○ 1마리) 사육에 임대인이 동의한다
반대로, 넣어도 효력이 없는 특약이 있습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10조는 이 법에 위반된 약정으로서 임차인에게 불리한 것은 효력이 없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 "임차인은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 무효
- "임차인은 전입신고를 하지 않는다" — 무효이자, 스스로 대항력을 포기하는 위험한 문구
- "보증금 반환은 다음 임차인이 구해진 후에 한다" — 임차인에게 불리해 효력을 다툴 수 있습니다
계약서를 쓴 다음, 시간 순서대로
계약서 작성은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날짜 싸움입니다.
① 잔금일 아침 — 등기부 재발급계약 때 뗀 등기부는 이미 과거입니다. 잔금 치르기 직전에 다시 떼서 근저당·가압류가 새로 붙지 않았는지 확인하세요. 700원입니다.
② 잔금일 당일 — 이사 + 전입신고 + 확정일자셋을 같은 날에 끝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주민센터에서 전입신고서를 내면서 계약서를 함께 제시하면 확정일자까지 한 번에 처리됩니다. 인터넷(정부24)으로도 됩니다.
- 대항력 = 주택의 인도 + 전입신고 → 다음 날 0시부터
- 우선변제권 = 대항력 + 확정일자 → 경매 시 배당 순위 확보
보증금 6천만원 또는 월세 30만원을 초과하면 신고 의무가 있습니다(수도권 전역, 광역시, 세종시, 도의 시 지역). 주택임대차계약 신고서를 시·군·구청이나 부동산거래관리시스템에서 제출합니다. 신고 접수가 완료되면 확정일자가 자동으로 부여되므로 따로 확정일자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2년 뒤: 갱신요구권을 쓰는 창은 4개월입니다
계약갱신요구권은 임대차기간이 끝나기 6개월 전부터 2개월 전까지 행사해야 합니다. 이 4개월이 지나면 권리 자체가 사라집니다.
날짜로 예를 들면, 2028년 9월 30일 만료 계약이라면 2028년 3월 31일 ~ 7월 31일 사이에 통지해야 합니다.
행사하면 2년 더 살 수 있고, 차임·보증금 증액은 종전 금액의 5%를 넘을 수 없습니다. 임대인은 실거주 등 주택임대차보호법 제6조의3 제1항 각 호의 사유가 있을 때만 거절할 수 있으며, 이때 쓰는 양식이 표준계약서에 함께 붙어 있는 별지2 「계약갱신 거절통지서」입니다.
통지는 증거가 남는 방법으로 하세요. 문자·카카오톡도 증거가 되지만, 다툼이 예상되면 내용증명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보증금을 올려서 갱신했다면, 올린 금액에 대해 확정일자를 다시 받아야 합니다. 기존 확정일자는 증액분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지훈 씨 이야기의 다른 결말
지훈 씨가 그날 다섯 시에 주민센터에 갔다면 어땠을까요.
금요일에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았다면 대항력은 토요일 0시에 생깁니다. 근저당권 설정등기가 토요일 접수라면, 임차인이 앞섭니다. 2억 4천만원을 먼저 배당받고, 남은 돈을 은행이 가져갑니다. 같은 경매, 같은 낙찰가인데 결과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계약서 한 장과 서류 한 장, 그리고 하루. 임차인이 통제할 수 있는 건 사실 그게 전부입니다. 대신 그 전부가 꽤 강력합니다.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 작성하러 가기 →원본 양식(법무부 2023.10.6 개정 PDF·HWP)도 함께 내려받을 수 있고, 항목마다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도움말이 붙어 있습니다. 별지1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한 중요사항」과 별지2 「계약갱신 거절통지서」도 원본 파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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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법무부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2023. 10. 6. 개정) 원본과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개별 사안의 법률 판단은 변호사·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 또는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상담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