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입자 들어오면 드릴게요"
서울 강서구의 아파트에 전세로 살던 수진 씨(가명, 35세)는 계약 만료 넉 달 전에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회사가 판교로 옮겨 갱신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알겠다고 했습니다. 수진 씨는 판교 근처에 새집을 계약했고, 잔금일은 전세 만료일 한 달 뒤로 잡았습니다.
만료일 보름 전,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 "요즘 집이 안 나가네요. 다음 세입자 들어오면 바로 드릴게요. 짐은 먼저 빼셔도 돼요."
수진 씨는 그 말이 호의인 줄 알았습니다. 새집 잔금은 대출로 맞출 수 있으니, 짐을 먼저 옮기고 보증금은 나중에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 업체와 날짜를 잡고, 전입신고는 새집으로 옮길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을 들은 부동산 사장이 말렸습니다.
> "짐 빼고 주민등록 옮기시면 안 돼요. 그 순간 이 집에 대한 권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임차권등기부터 하고 나가셔야 해요."
짐을 빼면 무엇이 사라지나
세입자를 지키는 권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항력입니다. 집이 팔리거나 경매에 넘어가도 새 주인에게 "나는 여기 세입자다, 보증금을 받을 때까지 못 나간다"고 주장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제1항은 임차인이 주택의 인도와 주민등록을 마친 다음 날부터 이 힘이 생긴다고 정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선변제권입니다. 집이 경매로 팔리면 그 돈에서 후순위 채권자보다 먼저 보증금을 받을 권리이고, 대항력에 확정일자를 더하면 생깁니다(법 제3조의2제2항).
문제는 이 두 권리가 '주택의 인도와 주민등록'이 유지되는 동안만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짐을 빼고 새집으로 전입신고를 하면 그날로 대항력이 사라집니다. 보증금은 아직 못 받았는데 권리만 먼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뒤에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수진 씨는 일반 채권자와 같은 줄에 서게 됩니다.
법은 이 공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임차권등기명령입니다.
| 임차권등기 전 이사 | 임차권등기 후 이사 | |
|---|---|---|
| 대항력 | 전출과 함께 소멸 | 그대로 유지 (법 제3조의3제5항) |
| 우선변제권 | 소멸 | 그대로 유지 |
| 경매 시 순위 | 일반 채권자 | 확정일자 순위 그대로 |
| 새 세입자 | 아무 제약 없음 | 최우선변제 못 받아 임대인 압박 (제6항) |
임차권등기명령이 하는 일
법 제3조의3제1항은 이렇게 정합니다.
> 임대차가 끝난 후 보증금이 반환되지 아니한 경우 임차인은 임차주택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법원·지방법원지원 또는 시·군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
법원이 결정을 내리면 등기부 을구에 '주택임차권'이라는 등기가 올라갑니다. 임대차계약일, 보증금, 점유를 시작한 날, 주민등록을 마친 날, 확정일자를 받은 날이 그대로 기록됩니다(임차권등기명령 절차에 관한 규칙 제6조). 그리고 같은 조 제5항이 핵심입니다.
> 임차인이 임차권등기 이전에 이미 대항력이나 우선변제권을 취득한 경우에는 그 대항력이나 우선변제권은 그대로 유지되며, 임차권등기 이후에는 제3조제1항의 대항요건을 상실하더라도 이미 취득한 대항력이나 우선변제권을 상실하지 아니한다.
등기가 된 뒤에는 짐을 빼고 주민등록을 옮겨도 권리가 남습니다. 수진 씨가 판교로 이사해도 강서구 아파트 등기부에는 "이 집에 2억 원 보증금의 세입자가 있다"는 기록이 붙어 있게 됩니다.
주의할 것은 순서입니다. 제5항이 지키는 것은 '이미 취득한' 권리입니다. 먼저 이사해서 권리를 잃은 다음에 등기를 해 봐야 잃은 권리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신청 → 결정 → 등기 확인 → 이사. 이 순서를 바꾸면 제도가 소용없습니다.
신청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
제1항을 다시 보면 조건이 둘입니다. 임대차가 끝났을 것, 그리고 보증금을 못 받았을 것.
수진 씨는 만료 넉 달 전에 갱신하지 않겠다고 통지했습니다. 법 제6조제1항은 임차인이 기간 만료 2개월 전까지 통지하지 않으면 묵시적으로 갱신된다고 정하므로, 넉 달 전 통지로 계약은 만료일에 끝납니다. 만약 아무 말 없이 만료일을 넘겨 묵시적 갱신이 됐다면 먼저 해지를 통지하고, 임대인이 통지를 받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야 계약이 끝납니다(법 제6조의2). 그 전에는 신청할 수 없습니다.
보증금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못 받았어도 됩니다. 규칙 제2조제1항제5호가 신청서에 적을 금액을 '반환받지 못한 임차보증금액'이라고 정하고 있어, 일부를 받았으면 남은 금액으로 신청합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났다고 세입자가 먼저 집을 비워 줄 의무는 없습니다. 법 제4조제2항은 "임대차기간이 끝난 경우에도 임차인이 보증금을 반환받을 때까지는 임대차관계가 존속되는 것으로 본다"고 정합니다. 집주인의 "짐은 먼저 빼셔도 돼요"는 법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신청서를 쓰다
수진 씨가 쓴 것이 임차권등기명령신청서입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이 제공하는 법률서식으로, 아파트용과 다세대주택용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성은 같습니다.
신청인 · 피신청인
신청인은 임차인, 피신청인은 임대인입니다. 규칙 제2조제1항제2호에 따라 양쪽의 성명·주소와 임차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습니다. 피신청인 주소는 계약서와 등기부 갑구의 소유자 주소가 다르면 최근 것을 적습니다. 상단의 '○○지방법원 귀중'에는 임차주택 소재지 관할 법원을 적습니다. 수진 씨의 집은 강서구이므로 서울남부지방법원입니다. 이사 갈 판교가 아닙니다.
신청취지 '아래' 1~5번
임대차계약일자, 임차보증금액과 차임, 주민등록일자, 점유개시일자, 확정일자. 이 다섯 가지가 등기부에 그대로 기록됩니다. 수진 씨는 처음에 주민등록일자를 기억으로 적었다가 초본을 떼 보니 하루가 달랐습니다. 잔금을 치른 날 저녁에 전입신고를 했는데, 온라인 신고가 다음 날 처리된 것이었습니다. 이 날짜가 대항력의 기준일이라 초본과 한 글자도 다르면 안 됩니다. 확정일자는 계약서에 찍힌 도장 날짜를 옮깁니다.
신청이유
규칙 제2조제2항이 무엇을 적을지 정하고 있습니다. 계약을 체결한 사실과 그 내용, 계약이 끝난 원인, 그리고 대항력·우선변제권을 갖췄다면 점유를 시작한 날·주민등록을 마친 날·확정일자를 받은 날입니다. 수진 씨는 이렇게 썼습니다.
> 신청인은 2024. 3. 15. 피신청인 소유의 별지목록 기재 건물에 관하여 임차보증금 200,000,000원, 기간 2024. 3. 30.부터 2026. 3. 29.까지로 하는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2024. 3. 30. 위 건물을 인도받아 2024. 3. 31. 전입신고를 마치고 같은 날 확정일자를 받은 뒤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습니다. 신청인은 2025. 11. 28. 피신청인에게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는 뜻을 통지하여 임대차는 2026. 3. 29. 기간 만료로 종료되었으나, 피신청인은 현재까지 임차보증금을 반환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간이 끝났다'는 사실과 그 근거(통지한 날)를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소명되지 않으면 기각됩니다.
[별지] 부동산의 표시
등기사항증명서 표제부를 그대로 옮기는 부분입니다. 1동 건물의 표시(소재지번·도로명주소·구조·층수·층별 면적), 전유부분의 건물표시(동·호수·구조·면적), 대지권의 목적인 토지의 표시, 대지권의 표시 순서로 적고 끝에 '끝.'을 붙입니다. 수진 씨는 대지권 비율 '12,345.6분의 45.67'을 옮기다가 소수점을 빠뜨렸고, 법원에서 보정 명령을 받아 일주일을 더 썼습니다. 등기관은 표기가 한 글자라도 다르면 등기를 하지 못합니다. 직접 타이핑하지 말고 등기부를 보고 옮기세요. 별지는 6부를 냅니다.
첨부서류
규칙 제3조가 정한 것은 등기사항증명서, 임대차계약증서(확정일자 있는 것), 점유개시일과 주민등록일을 소명하는 서류(주민등록초본), 그리고 등기부상 용도가 주거시설이 아니면 주거용으로 쓰고 있음을 증명하는 서류입니다. 수진 씨는 여기에 갱신 거절을 통지한 문자 캡처와 내용증명 사본을 붙였습니다.
비용은 몇만 원, 그것도 집주인에게 청구
| 항목 | 금액 | 근거 |
|---|---|---|
| 인지 | 2,000원 | 규칙 제2조제3항 |
| 등록면허세 | 6,000원 | 지방세법 제28조제1항제1호마목 '그 밖의 등기' |
| 지방교육세 | 1,200원 | 등록면허세의 20% (제151조제1항제2호) |
| 송달료·등기신청수수료 | 접수 법원 안내 금액 | 대법원 규칙·고시로 변동 |
직접 하면 전체 비용이 몇만 원입니다. 그리고 법 제3조의3제8항은 "임차인은 임차권등기명령의 신청과 그에 따른 임차권등기와 관련하여 든 비용을 임대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수진 씨는 영수증을 모아 두었다가 보증금과 함께 청구했습니다.
집주인이 전화를 안 받아도 등기는 됩니다
수진 씨가 신청서를 낸 뒤 집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막혔습니다. 임차권등기명령은 임대인에게 결정을 송달해야 효력이 생기고(규칙 제4조제3항), 그 뒤에 등기를 촉탁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이 문을 안 열어 주면 송달이 안 되고, 송달이 안 되면 등기가 안 되고, 등기가 안 되면 세입자가 이사를 못 갔습니다.
2023년 7월 19일부터 바뀌었습니다. 규칙 제5조 단서는 "주택임차권등기명령의 경우에는 임대인에게 임차권등기명령의 결정을 송달하기 전에도 임차권등기의 기입을 촉탁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법 제3조의3제3항이 민사집행법 제292조제3항을 준용하도록 같은 해 개정된 데 따른 것입니다. 이제 집주인이 잠적해도 등기는 됩니다.
수진 씨는 결정이 난 뒤 등기사항증명서를 다시 뗐습니다. 을구에 '주택임차권'이 올라 있었습니다. 그날 이사 업체에 전화했습니다.
등기 뒤에 남은 일
임차권등기는 보증금을 받아 주는 절차가 아닙니다. 권리를 지키는 절차입니다. 등기 뒤에도 집주인이 안 주면 지급명령이나 보증금반환청구 소송으로 집행권원을 받아 경매를 신청해야 합니다. 이때 임차권등기가 있으면 이사를 나갔어도 확정일자 순위 그대로 우선변제를 받습니다.
집주인 쪽에도 압박이 됩니다. 법 제3조의3제6항은 임차권등기가 된 집에 그 뒤 들어오는 세입자는 소액보증금 최우선변제를 받지 못한다고 정합니다. 등기부에 임차권등기가 보이면 새 세입자가 꺼립니다. 수진 씨의 집주인은 등기 두 달 뒤 보증금을 보냈습니다.
보증금을 받으면 임차권등기를 말소해 주어야 합니다. 순서는 집주인의 보증금 반환이 먼저이고 세입자의 말소가 그다음입니다. "말소부터 해 주면 보증금을 주겠다"는 요구에 응할 의무는 없습니다. 다 받은 뒤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 취하·해제 신청을 하면 됩니다.
순서를 정리하면
- 계약이 끝났는지 확인 — 갱신 거절 통지(만료 6~2개월 전) 또는 묵시적 갱신 후 해지 통지 + 3개월
- 주민등록초본·확정일자 있는 계약서·등기사항증명서 발급 — 세 날짜를 서류대로
- 신청서 + [별지] 부동산의 표시 6부 작성 — 등기부 표제부를 그대로 옮기기
- 임차주택 소재지 관할 법원에 접수 — 인지 2,000원, 등록면허세 6,000원 + 지방교육세 1,200원, 송달료
- 결정 → 등기사항증명서 을구에 '주택임차권' 확인 → 그다음에 이사·전출
- 보증금을 못 받으면 지급명령·소송 → 받으면 임차권등기 말소
수진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 먼저 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고마웠어요. 그게 제 권리를 없애는 말인 줄은 부동산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서식과 원본
항목별 작성 안내와 대한법률구조공단 법률서식 원본(아파트용·다세대주택용·제도 설명 HWP)은 임차권등기명령신청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계약 종료를 통지하는 단계라면 계약해지 통보서와 내용증명을, 등기 뒤에 보증금을 청구하는 단계라면 지급명령 신청서를 함께 보세요.
보증금 액수가 크거나 집에 이미 근저당·가압류가 있다면 임차권등기와 별개로 배당 순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신청 전에 대한법률구조공단이나 변호사·법무사와 먼저 상담하시길 권합니다.